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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자랑하는 일대 자동차 생산 메이커로서 세계의 제조업을 견인해온 토요타 자동차. 그 토요타 자동차를 포함한 토요타 그룹의 역사와 기술을 학습할 수 있는 기념관이 아이치현 나고야시의「토요타 산업 기술 기념관」입니다.
기념관이라 하면 조금 딱딱한 이미지가 있지만, 이 시설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 호평합니다! 그 인기는 트립어드바이저가 뽑는「여행 마니아가 뽑는!공장 견학&사회 견학 랭킹」에서 4년 연속 1위를 획득할 정도.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토요타 산업 기술 기념관의 매력을 알아봅니다.
후편에서는 토요타의 자동차 만들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배울 수 있는「자동차관」을 중심으로 소개해 갑니다.
▼전편의 기사는 여기
토요타의 자동차 만들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
「자동차관」
연장 7,900㎡의 넓이를 자랑하는 자동차관에서는 토요타의 자동차 만들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요타 사키치의 장남인 토요타 키이치로가 중심이 되어 국산 자동차의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의 걸음부터 창업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나 기술의 진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제조업을 견인하는 토요타 자동차의 세계를 들여다 봅시다.
섬유 기계에서 자동차로
왜 섬유 기계를 주로 하고 있던 토요타 그룹이 자동차 사업에 착수했을까요?
그 계기가 된 것은 토요타 키이치로가 1921(다이쇼 10)년에 방문한 유럽,미국의 방직업 시찰입니다. 키이치로는 이미 대중의 발이 되어가고 있던 자동차의 발달에 눈을 빼앗겼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23(다이쇼 12)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의 물류의 중심이었던 철도망은 파괴되어 수입 트럭이나 T형 포드를 개량한「엔타로 버스」가 부흥의 발로 대활약했습니다.
엔타로 버스
지진 재해 후, 자동차의 보급이 시작된 일본이지만, 1925(다이쇼 14)년에는 포드사, 1927(쇼와 2)년에는 GM사 등 미국 메이커가 일본 국내에 공장을 마련해 생산 대수가 점점 늘어나 갔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약 99%가 외국차라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토요타 그룹 창업자인 토요타 사키치의 장남 토요타 키이치로
스미스 모터 휠
「앞으로는 자동차의 시대다!」일본인의 두뇌와 솜씨로 국산 자동차를 만들고자 토요타 키이치로는 젊은 기술자들과 함께 자동차의 연구에 내디뎠습니다. 자전거에 장착하여 사용하는 소형 엔진「스미스 모터 휠」을 참고로 소형 가솔린 엔진의 시작부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사업에의 진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에 사내외에서는 강한 반대 의견들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키이치로는 토요타 토시사부로 사장을 설득해 1933(쇼와 8)년에 자동차부를 개설. 본격적인 자동차 시험 제작이 시작됩니다.
제로부터 시작한 자동차 만들기
재료 시험실 건설
「재료 시험실」실제 건물의 일부를 이축해 당시의 시험실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실험기가 당시에 가까운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생산에서 첫 번째 과제는「재료의 확보」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제강업계에는 자동차용 철강 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키이치로는 대량 생산을 바라본 자동차용 철강 재료를 자전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당시 제국 대학과 거의 동등한 최신 연구 기기를 갖춘「재료 시험실」을 설립하였습니다.
고투하는 엔진 시작
주조의 모습
엔진 개발에 착수한 키이치로는 우선 자동차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엔진의「실린더 블록」의 시작에 도전합니다. 실린더 블록은 모래로 만든 틀에 철을 부어 식혀서 굳어진 뒤에 모래 틀을 깨고 제품을 꺼내는「주조」라는 가공법으로 만듭니다.
A형 엔진의 실린더 블록(복제)
방직기에서 기른 주조 기술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키이치로와 동료들이지만 복잡한 형상과 얇은 주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기존의 노하우에서는 제작할 수 없었습니다. 시작 성공까지의 3개월간에 500~600개의 실린더 블록이 낭비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전 고투의 나날을 극복해「A형 엔진」이라고 이름을 붙인 토요타 최초의 양산형 엔진이 탄생했습니다.
유선형과 올 스틸 바디
재현된 시작작 공장
「A1형 프로토타입 승용차」의 바디 패널은 모두 손으로 두드린 판금 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엔진의 다음은 드디어 바디입니다.
당시 차량의 골격은 목조가 주류였습니다. 또 유선형의 디자인도 미국에서도 최첨단인 것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지속성이 있는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유선형의 디자인과 올 스틸제의 바디 구조가 채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동차부를 개설하고 나서 1년 반 후의 1935(쇼와 10)년 5월. 드디어 최초의 시작차「A1형 시작 승용차」가 완성되었습니다.
애프터 서비스의 원점으로도 이어지는
「G1형 트럭의 탄생」
프로토타입 공장을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있는 코너에서는 현재의 애프터 서비스의 원점으로도 이어지는「G1형 트럭의 탄생」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G1형 트럭 1/35 모형
당시 정부에서의 요청을 받아 키이치로는 승용차 개발을 일시 중단하고 급하게 트럭 제조에 착수했습니다. 1935(쇼와 10)년 3월에 설계를 개시. 이미 개발이 끝나 있던 A형 엔진을 사용해, 제조에 시간이 부족한 부품은 포드나 시보레의 보급 부품을 유용. 이렇게 하여 같은 해 8월에「G1형 트럭」의 시작품 제1호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의 개발과 제조가 불해을 초래해「G1형 트럭」은 고장이 속출했습니다. 결함 하나 하나를 개선해 1년간에 800건 이상의 개선을 실시하므로 품질이 안정되게 되었습니다.